솔직히 저는 가리왕산을 너무 만만하게 봤습니다. 여름 피서용 산행지로 검색하다 우리나라에서 9번째로 높은 산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고, "그래도 육산이니까 괜찮겠지" 싶었는데 다녀온 뒤 그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에어컨보다 시원하다는 이끼폭포는 소문 이상이었고, 그만큼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가팔랐습니다.

가리왕산 이끼폭포, 실제로 가보니 어떤가
가리왕산의 가장 큰 매력은 단연 이끼폭포 구간입니다. 장구목 2 들머리에서 출발해 정상까지 이어지는 4.2km 등산로 중, 초반 약 2.5km 구간에는 이끼폭포가 9개 연속으로 이어집니다. 저도 이 정도 규모의 이끼 계곡은 국내에서 처음 봤습니다.
여기서 이끼폭포란 바위와 주변 지형 전체를 이끼류(bryophyte)가 뒤덮은 상태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폭포를 말합니다. 이끼류는 습도가 높고 직사광선이 적은 환경에서 자라기 때문에, 이끼폭포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계곡의 수분과 그늘이 잘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폭포 옆을 지날 때마다 온도차가 느껴질 정도로 냉기가 올라왔고, 안경에 습기가 찰 정도였습니다. 체감상 에어컨 18도를 틀어놓은 방에 들어서는 느낌이라고 하면 과장이 아닙니다.
등산로의 유형 측면에서 가리왕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입니다. 육산이란 암릉이나 암봉 없이 흙과 수목으로 이루어진 산을 뜻합니다. 덕분에 바위를 타는 위험은 없지만, 그 대신 등산로에 수풀이 많이 침범해 있어 풀독에 민감한 분들은 긴 소매와 긴 바지를 반드시 챙기셔야 합니다. 제가 직접 걸어보니 특히 정상 부근은 최근 강수량이 많아서인지 등산로 폭의 절반 이상이 풀에 잠긴 구간도 있었습니다.
가리왕산은 산림청과 월간산 선정 100대 명산에 모두 이름을 올린 산입니다(출처: 산림청). 해발 1,561m로 국내 9번째 높이이며, 장구목 2 들머리 기준 시작 고도는 430m 수준입니다. 즉 한 번의 산행에서 약 1,130m를 오르는 셈입니다. 이 수치를 보면 왜 6시간 안팎이 소요되는지 납득이 됩니다.
이끼폭포 구간에서 기억에 남는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5폭: 계곡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지며 접근이 쉬운 편
- 6~8폭: 이끼 밀도가 가장 높고 냉기가 가장 강하게 올라오는 구간
- 9폭: 마지막 폭포로 여기서부터 경사가 급격히 가팔라지며 계곡과 멀어짐
9폭을 지나면 그늘도 시원함도 급격히 사라집니다. 저도 이 지점부터는 완전히 다른 산을 오르는 느낌이었습니다.
산행 난이도와 접근성, 사전에 알면 좋은 것들
솔직히 이 부분에서 제가 가장 크게 실수했습니다. 육산이라는 말만 믿고 "험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장구목 임도(林道)를 지나면서부터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임도란 산림 관리를 위해 산속에 개설된 차량 통행 가능 도로를 뜻하는데, 이 임도에서 정상 방향으로 접어드는 약 400m 구간의 경사도가 체감상 50%에 육박합니다. 400m를 오르는 동안 고도를 200m 가까이 획득하는 구간입니다. 제가 가본 산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가파른 오르막이었습니다.
전체 산행 거리는 장구목 2 출발, 어은골 하산 기준 약 11km이며, 제 경험상 5시간 50분이 걸렸습니다. 함께한 산악회 기준으로는 6~7시간을 배정하더라고요. 최고 고도 1,561m, 누적 상승 고도는 약 1,160m입니다. 이 수치는 북한산 한 번 다녀오는 것의 두 배 이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누적 상승 고도(Elevation Gain)란 산행 중 오른 고도의 총합을 뜻합니다. 단순히 정상 높이가 아니라 실제로 다리에 쌓이는 부하를 가늠하는 지표로, 등산 난이도를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수치입니다. 국립등산학교 자료에 따르면 누적 상승 고도 1,000m 이상은 중급 이상의 체력이 요구되는 산행으로 분류됩니다(출처: 국립등산학교).
접근성 문제도 미리 알고 가셔야 합니다. 장구목 2 들머리에는 공식 주차장이 없고 갓길 주차에 의존해야 합니다. 저는 일요일 오전 10시에 도착했는데 그나마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입구에 화장실과 매점이 없으므로 반드시 이전 휴게소에서 준비를 마치고 오셔야 합니다. 대중교통은 사실상 없다고 생각하시는 게 맞고, 자가용 없이는 접근이 매우 어렵습니다.
정상은 헬기장으로도 활용되는 넓은 공터인데, 정상에서의 조망은 솔직히 기대보다 제한적입니다. 나무가 완전히 제거된 공터는 넓지만, 사방이 시원하게 트이는 암릉 정상과는 느낌이 다릅니다. 저는 그날 날씨가 좋아서 강원도 산그림자가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을 볼 수 있었지만, 흐린 날이라면 감동이 상당히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목 군락지도 놓치지 마세요. 주목(朱木, Taxus cuspidata)은 수명이 수백 년에 달하는 상록침엽수로, 국내 높은 산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 수종입니다. 가리왕산 정상부 인근에서 만난 주목은 한 아름이 넘는 굵기에 붉은빛 줄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진으로는 그 실제 크기와 분위기가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는 게 제 솔직한 평가입니다.
가리왕산이 처음이라면 이끼폭포 9폭까지만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이 구간만으로도 왕복 약 5km, 2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히 즐길 수 있고, 가리왕산의 핵심 매력은 이 구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리왕산은 정상 인증보다 오르는 과정이 더 기억에 남는 산입니다. 멋진 암릉이나 파노라마 조망을 기대하고 간다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여름 이끼 계곡을 걷고 싶다면 국내에서 이만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음 산행을 계획하신다면 이끼폭포 냉기가 가장 강한 7월 중순에서 8월 초를 추천드립니다. 단, 갓길 주차 사정과 대중교통 부재는 반드시 사전에 확인하시고, 누적 상승 고도 1,160m를 소화할 체력을 충분히 준비하신 후 가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