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처음에 "845m짜리 산이 얼마나 힘들겠어"라고 생각했던 제가 틀렸습니다. 계룡산은 해발고도가 주는 숫자의 인상과 실제 산행 강도 사이에 꽤 큰 간격이 있는 산입니다. 동학사 주차장에서 관음봉까지 이어지는 코스는 총 11.8km 거리에 약 3시간 40분이 소요되는데, 발보다 폐가 먼저 항복을 선언하는 구간이 여럿 있었습니다.

관음봉까지,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은 고도 싸움
동학사 매표소를 지나 사찰 방향으로 걷다 보면 처음에는 계곡을 따라 완만한 숲길이 이어집니다. 이 구간에서 "역시 국립공원은 잘 정비되어 있네"라고 방심하기 딱 좋습니다. 제가 직접 걸어보니 그 방심이 은선폭포 이후 구간에서 정확히 대가를 치렀습니다.
은선폭포는 해발 약 460m 지점에 자리한 낙차 46m 규모의 폭포입니다. 다만 방문 시점에 따라 물이 거의 없는 건폭(乾瀑) 상태일 수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건폭이란 물이 마르거나 극히 적어 폭포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폭포를 기대하고 갔다가 바위 절벽만 보고 오는 경우도 있는 만큼, 강수량이 많은 계절을 노리는 것이 현명합니다.
폭포 이후부터 관음봉 직전까지는 이른바 깔딱 구간이 두 차례 이어집니다. 여기서 깔딱 구간이란 경사도가 급격히 올라가 호흡이 가빠지는 고난이도 오르막 구간을 뜻하는 등산 용어입니다. 계단과 너덜지대가 번갈아 나오고, 중간중간 데크 계단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너덜지대란 크고 작은 돌덩어리가 흩어져 쌓인 사면 구간으로, 계룡산은 화강암 지대 특성상 이 구간이 특히 많습니다. 발목 부상 위험이 있으므로 등산 스틱 활용을 권장합니다.
관음봉(해발 766m)은 계룡산의 실질적 정상 역할을 합니다. 계룡산 최고봉인 천황봉(845m)은 계룡대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일반 등산객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국립공원공단에 따르면 계룡산국립공원의 연간 탐방객은 300만 명 수준으로, 수도권 국립공원을 제외하면 전국 최상위권에 해당합니다(출처: 국립공원공단). 그만큼 코스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만큼 주말 혼잡도도 상당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관음봉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산줄기들이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제 경험상 이 순간만큼은 올라오면서 쌓인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정상에서의 조망, 이게 사람들이 계룡산을 44번씩 오르게 만드는 이유 아닐까 싶었습니다.
자연성릉이 이 산의 진짜 얼굴입니다
관음봉에서 삼불봉(775m) 방향으로 이어지는 1.6km 능선이 바로 자연성릉 구간입니다. 자연성릉이란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릉이 마치 성벽처럼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지형을 일컫는 말입니다. 계룡산의 자연성릉은 국내 산에서도 보기 드문 수준의 경관을 자랑하는데, 실제로 걸어보니 사진으로 보는 것과 차원이 달랐습니다.
양쪽으로 절벽과 암릉이 이어지면서 발아래로 계곡과 숲이 내려다보이고, 시선을 올리면 천황봉 방향 산줄기가 웅장하게 펼쳐집니다. 이 구간은 고소공포증(高所恐怖症)이 있는 분이라면 체감 난이도가 크게 올라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위험한 클라이밍 수준은 아니지만, 좁은 능선 위에서 양쪽이 트인 공간을 걷는 감각은 처음 겪으면 꽤 낯설 수 있습니다.
자연성릉 구간의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뷰 포인트가 구간 전체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어 걸음을 멈출 이유가 계속 생깁니다
- 삼불봉(775m)은 관음봉보다 해발고도가 높지만, 관음봉에서 천황봉까지의 직선 거리가 더 가깝다는 이유로 관음봉을 공식 정상석으로 인정합니다
- 삼불봉 직전 구간에 이른바 '천국의 계단'이 있는데, 체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만나는 마지막 오르막이라 정신력이 더 중요한 구간입니다
삼불봉에서 남매탑 방향으로 하산하면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 두 기를 만납니다. 남매탑은 오누이 전설이 깃든 탑으로, 현재도 사찰 수행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남매탑(청량사지 쌍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출처: 문화재청). 하산길에서 이 탑을 보면서 잠시 쉬었는데, 올라갈 때와 달리 발걸음이 느긋해지면서 주변 풍경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후 큰배재를 경유해 천정탐방지원센터 방향으로 하산하면 동학사 주차장으로 돌아옵니다. 총 산행 거리 11.8km, 최고 고도 775m(삼불봉 기준). 숫자는 수수해 보이지만, 제가 직접 걸어보니 이 코스는 초보 등산객에게 가볍게 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계룡산은 "잠깐 다녀올 수 있는 근교 산"보다 "제대로 준비하고 가야 하는 국립공원 산행지"에 훨씬 가깝습니다. 특히 여름철에는 능선 위 직사광선이 체력 소모를 크게 늘리기 때문에, 이른 아침 출발과 충분한 수분 보충이 필수입니다. 바위 능선과 조망이 압도적인 산을 찾고 있다면, 계룡산은 충청권에서 이 조건을 가장 잘 충족하는 선택지라고 봅니다. 한 번 오른 사람이 또 오고 싶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