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속리산을 법주사와 천왕봉 정도만 알고 올랐다가, 능선에서 펼쳐지는 기암괴석 지대와 상고암의 존재에 완전히 압도됐습니다. 법주사에서 출발해 상고암, 천왕봉, 입석대, 문장대까지 이어지는 이 코스는 체력도 많이 소모되지만, 그만큼 속리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주는 루트입니다.

세조길과 법주사, 시작부터 달랐습니다
저도 처음엔 법주사만 슬쩍 보고 바로 산행을 시작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매표소에서 게이트를 통과하면 바로 두 갈래 길이 나타납니다. 오른쪽은 포장된 일반 탐방로, 왼쪽이 세조길 자연관찰로입니다.
세조길이란 조선 7대 임금 세조가 속리산에 요양차 방문했을 때 복천암까지 오가던 수행로를 복원한 길입니다. 왕이 걸었던 길이라는 이야기에 괜히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목욕소라는 지점에서 두 길이 합류하는데, 여기까지만 해도 계곡물 소리와 숲 향기가 기분 좋게 코를 자극합니다.
법주사는 국보만 3점이 있는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당간지주(국보 제64호), 팔상전(국보 제55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이 그것인데, 당간지주란 절의 입구에서 깃발을 달기 위해 세운 두 개의 돌기둥을 말합니다. 산행 전에 잠깐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가 됩니다. 법주사 경내는 국가지정문화재 구역으로, 문화재청이 정기적으로 보존 상태를 점검하고 있습니다(출처: 문화재청).
세심정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됩니다. 경업대 방면으로 올라서면 경사도가 급격히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저는 여기서부터 숨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상고암 오르는 길, 일반적인 믿음과 달랐던 것들
일반적으로 속리산은 천왕봉 코스 위주로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 산의 진짜 매력은 상고암 구간에 있습니다. 경업대 갈림길에서 상고암 방향으로 접어들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거대한 바위들이 머리 위를 덮을 듯 솟아 있고, 계곡 사이로 작은 폭포들이 흘러내립니다. 전날 비가 내렸던 덕분인지 폭포들이 꽤 볼 만했습니다. 바위 표면에 돌들이 박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특이한 지형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는데, 지질학적으로는 이를 역암(礫岩)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역암이란 크고 작은 자갈들이 퇴적물과 함께 굳어진 퇴적암의 일종으로, 속리산 일대의 지층 특성과 연결됩니다.
상고암과 천년송 분기점에서 천년송까지는 100m도 채 안 됩니다. 직접 가보니 백두대간 주능선이 한눈에 펼쳐지는 전망 포인트가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백두대간이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중심 산줄기를 말하며, 속리산은 그 주요 통과 지점 중 하나입니다.
상고암에 도착하면 관음전과 극락전, 그리고 전망대가 있습니다. 전망대에서는 문장대, 입석대, 경업대가 일렬로 펼쳐지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스님께서 쉬다가도 되니 자주 오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빈말이 아닐 만큼 고요하고 좋은 자리였습니다.
상고암 인근에는 굴법당도 있습니다. 거대한 바위 아래에 법당을 만들어 놓은 구조인데, 해발 897m 지점에 이런 시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습니다.
천왕봉에서 문장대까지, 능선이 주는 것들
일반적으로 천왕봉이 속리산의 최고봉으로 알려져 있고, 많은 분들이 거기서 산행을 마칩니다. 하지만 실제로 걸어보니 천왕봉에서 문장대까지 이어지는 능선 구간이 이날 산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천왕봉 해발 1,057m에서 능선을 타고 서쪽으로 가면 상고석문, 고릴라바위, 입석대, 신선대, 문수봉, 문장대가 차례로 나옵니다. 능선 종주란 정상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따라 걷는 방식으로, 단일 봉우리만 오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체험을 줍니다.
속리산 국립공원의 이 능선 구간은 낙석 위험 구간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대피소 근처에서 과거 낙석 사망 사고가 있었던 지점을 지나쳤는데, 안전 철망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국립공원공단의 탐방 안전 수칙에 따르면 바위 사면 인근을 지날 때는 특히 주의가 필요합니다(출처: 국립공원공단).
능선에서 만난 주요 암석 지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상고석문: 커다란 바위 사이를 통과하는 천연 문 형태의 지형
- 고릴라바위: 고릴라 얼굴과 흡사한 형상의 바위
- 입석대: 칼날 능선 끝에 우뚝 선 석주 형태의 바위군
- 문수봉: 사자를 상징한다는 설이 전해지는 봉우리
- 문장대: 속리산 능선 서쪽 끝에 위치한 전망 포인트
입석대 구간에서는 바위 사이를 오르내리는 구간이 있어 상당히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이날 날씨가 좋아서 오히려 다행이었지만, 비 온 다음 날이면 미끄럼 주의가 절실한 구간입니다.
문장대 하산, 체력 배분이 핵심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이 코스를 걸어보니 느낀 가장 큰 교훈은 체력 배분이었습니다. 법주사에서 문장대까지 편도 약 13.7km, 원점 회귀 총 거리 약 23km는 일반적인 당일 산행 기준으로는 상당히 긴 거리입니다.
문장대에서 법주사로 내려오는 하산 루트는 돌계단 구간이 먼저 시작됩니다. 무릎 부담이 상당한 편이고, 특히 종주를 마친 이후 피로한 다리로 이 구간을 내려오는 건 쉽지 않습니다. 하산 중간에 중사자암을 들를 수 있는데, 원래는 상사자암·중사자암·하사자암이 있었지만 현재는 중사자암만 남아 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보현봉은 코끼리를, 문수봉은 사자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들이 내려오는 동안 지친 다리를 잠시 쉬게 해줍니다.
복천암을 지나 세심정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세조길 구간은 보후의 햇살이 숲 사이로 들어오면서 걷기가 좋았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어느 정도 안도감이 생깁니다.
하산 이후 돌아보면 이 코스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들이 분명해집니다.
- 법주사 출발 기준 총 거리 23km 내외로, 충분한 체력 확보 필수
- 상고암 구간까지는 계곡 지형이라 겨울이나 우기에는 미끄러울 수 있음
- 천왕봉~문장대 능선은 낙석 위험 구간 포함, 기상 확인 필수
- 주말·단풍철 성수기에는 주차장 조기 만차 가능성 있음
- 하산길 돌계단 구간은 무릎 보호대 착용 권장
속리산은 이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도 다시 오고 싶어지는 산입니다. 특히 단풍철 세조길과 상고암 주변은 눈에 담아두고 싶을 만큼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체력이 충분하다면 법주사
상고암
천왕봉~문장대로 이어지는 이 코스를 꼭 한 번 완주해 보시길 권합니다. 중간에 포기하더라도 상고암까지만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속리산을 느낄 수 있습니다.